B

[고레츠] 춘하추동

우잉(ういん) 2018. 5. 13. 00:01

Pixiv 시노부(シノブ)님의 고레츠 소설인 춘하추동의 번역본입니다.

주인장이 정독할 요량으로 개인적으로 번역하던 것을, 시노부님의 허락 하에 블로그에 게재하게 되었습니다.


무단전제 및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.



이하는 원문링크

https://www.pixiv.net/novel/show.php?id=5843604









작가의 말


트위터에서 썼던 어른 고레츠가 뭔가 춘하추동과 이어지는 것 같아서.

전체적으로 츠바사군 미안해 시리즈입니다. 좀 어두운 이야기나 소위 어른의 관계를 받아들일수 있는 분만 부탁해요. 진단메이커의 "이 서두/끝맺음 어때요?"를 이용했습니다.










 

 

 

봄비가 나를 적신다. 투명한 빗방울은 투명한 우산 위를 흘러 발언저리에 떨어져 튀어서는 발을 싸늘하게 적셨다. 비닐우산 밑에서 내밀어본 하늘은 온통 엷은 회빛깔. 흐리지만 빛나는 것처럼도 보이는 그 하늘에서, 봄치고는 굵은 물방울 무리가 기분 좋은 리듬을 타며 몇 번이고 겹쳐져 내려온다. 이따금 빗방울에 섞여 뚝, 뚝 연분홍빛 꽃잎이 내려앉아서, 그게 투명한 비닐우산에 달라붙어 말린꽃처럼 보이는 모습을 어딘가 멍한 기분으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.

 

봄은 내게 있어선 결의의 계절로, 그리고 이별의 준비를 위한 계절이기도 했다. 그로부터 몇 년을 돌아서도 줄곧,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는 어딘가 감상적인, 그리고 뒤숭숭한 기분이 된다. 예를 들어 이제 곧 졸업을 맞게 될 다 낡은 란도셀을 등에 멘 초등학생이라 부르기에는 커다란 아이들을 보거나, 본가 근처 학군의 중학교의 신입생으로 보이는 교복차림의 아이들을 보거나 할 때는 특히.

 

 

레츠 형

 

 

벚나무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내 뒤로, 약한 딱딱한 인상을 받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. 뒤돌아보자 고는 조금 실망한 얼굴을 하고 있다. 대체 뭐가 맘에 안 든다는 거야.

 

갑자기 어디 가버리니까. 뭐 보는 거야?”

중학생 애들이 있었어. 신입생인가? 교복도 헐렁헐렁하고.”

그런 거 아닌가? 중학생이 뭐가 어쨌는데?”

아니. 아무 것도 아냐.”

 

 

그렇게 말하고 우산을 팍 접자, 고가 뭐 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듯이 제 우산을 내밀어 왔다. 짙은 파란색의 커다란 우산. 여전히 쏟아지는 빗방울은 나를 흠뻑 적시지 않는 채로 그 우산에 가로막혔다. 이 우산 아래라면 하늘도 벚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. 그에 까닭도 없이 한숨 돌린 기분이 된다.

 

 

, 여기까지 차타고 온 거야?”

아니 걸어서. 형도 걸어서 왔잖아.”

, 그러게

 

 

! 하고 다시 비닐우산을 펼쳐 가볍게 물방울을 털고 걷기 시작했다. 대체 뭐야 하고 투덜대는 걸 들으며 보폭을 맞춰 고의 옆을 걸었다. , 아무것도 아니야. 이 시기엔 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될 뿐이야. 여기로 막 돌아왔을 때는 맞춰줄 생각도 없었던 보폭을 어느 샌가부터 자연스럽게 맞추게 된 거라던가, 그때 저 교복을 입고 이렇게 둘이서 걸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싶은 거라던가, 이대로 미국에 비하면 융통성이라곤 없는 일본의 조직에서, 언제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 생각할 수 있을까 라던가.

 

맘대로, 어디 가지 마. 고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하다.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슬쩍 비친 그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었다. 아주 조금의 미안함과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이, 봄의 조용한 비처럼 촉촉하게 마음에 찼다.











여름

 

 

 

새파란 하늘에, 환상처럼 하얀 달이 둥실 떠있다. 이 시기는 기류가 안정되어있어서 달의 크레이터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. 여름 아침의 하현달이 일 년 중에 가장 아름답다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, 남쪽 하늘 높이를 건너는 하늘의 배는 아름답게 빛나 보이는 것이었다.

 

시각은 530. 해가 뜬 지 한 시간 정도 일까. 영국과의 시차는 9시간. 현지는 계산하면 21시 반 정도이다. 레츠는 조금 고민하다 전화의 발신이력 화면을 열었다. 눈에 익은 이름의 주인 앞으로, 식별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. 요새는 국제전화도 손쉬워 졌다는 생각이 든다.

 

――여보세요, ?

――, 아니. 그냥. 예선 어땠어?

――그렇구나. 잘됐네. 내일도 하지? 잘 해.

――츠바사 군? 아직 자고 있어. 여기는 아직 5시 반이라고. 어제 칠석이었잖아. 좀 늦게 잤어. 엄마가 치라시즈시 만들어주셨긴 한데, 그거 먹고 나서 조릿대에 탄자쿠 걸고 별 같은 거 얘기하다가.

――그런 건 돌아와서 네가 직접 확인해. 탄자쿠 남겨둘 테니까.

――? 내 건……사업발전 같은 거.

――시끄러워, 이제 끊는다. ? 어어, . ……. ……알겠으니까.

 

그럼, 내일 열심히 해, 라고 무난한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. 레츠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하얀 달이 떠오른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. 어젯밤은 몇 년 만에 매우 맑은 칠석날 밤이라 견우직녀도 마음껏 밀회를 즐겼겠지. 그런 별이 총총한 밤에 쓰인 츠바사의 탄자쿠는 창가에 세워진 조릿대 가지에 묶여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. 레츠는 창가까지 이동해 한 번 더 그 탄자쿠를 손에 올려 바라보았다. 소원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. 아이다워서 알기 쉬운.

 

아빠랑, 더 많이많이 놀 수 있게 해주세요.’

 

해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내는 아버지를 둔 아이라면 무리는 아니라 할 만한 소원이다. 레츠는 조금 눈을 가늘게 뜨고, 어젯밤 츠바사의 이 소원을 봤을 때처럼 이것과 상반될 것일 자신의 바람을 조용히 마음속에 묻었다. 레츠는 츠바사 바람을 이룰 수 있는 심플한 방법을 안다. 알지만――사고는 항상 거기서 정지했다.

 

창밖의 새파란 하늘에는, 하얀 하현달이 보인다. 두둥실 두둥실 믿을 수 없이 현실감이 없는, 그러면서도 몹시 아름답기도 한 그것은, 이울어 가기만 하는 사라져가는 새벽의 달이었다.










가을

 

 

 

――운동회?

――. 다음 달 이날인데 아빠 레이스 해?

――따로 없어. 그럼 보러갈까?

――만세! 레츠삼촌도 왔음 좋겠다.

――괜찮을거야. 그 날은 쉬니까, 응원하러 갈게.

――정말? 만세! 그럼 엄마한테 삼촌 도시락도 만들어달라고 할게!

――……도시락은, 삼촌 건 삼촌이 준비할테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. 연습 열심히 해.

――그래? 같이 먹는 게 분명 더 맛있을거야.

――미안, 츠바사군.

 

 

 

***

 

 

 

――? 레츠 삼촌, 오늘 못 오게 된 거야?

――급한 일이 들어 왔다나봐. 뭐 책임자니까 별 수 없지.

――그렇구나……고생이네.

――나중에 운동회 얘기 들려주래. 그러니까 열심히 해.

――.

――미안하다 사과 했잖아.

――아니야. 삼촌 잘못도 아닌걸.

 

 

 

***

 

 

 

――미안 츠바사군. 갑자기 못 가게 돼서.

――괜찮아, 아빠가 와줘서 엄청 좋았어! 일 많이 힘들었지?

――, 뭐 그렇지. 좀 트러블이 있다고 불러내서.

――책임자는 힘들구나. 레츠 삼촌이 잘못한거 아닌데.

――…아니야. 삼촌이 잘못했어. 미안해.

――레츠 삼촌?

――미안해, 츠바사군.

 

 


***

 

 

  

무엇을 사과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, 삼촌은 나에게 '미안해'라 말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.

그럴 때는 대부분 삼촌이 조금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 있고, 아버지가 입을 다물고 있는 형태였다.

지금도 그 '미안해'의 이유는 잘 모르겠다. 그 때의 표정의 의미도. 그저, 둘 밖에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.

 

내가 고등학생일 때,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.

아버지의 재산 상속권이 어쩌니, 친권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로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지만, 그렇지 않고선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다는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었다.

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했대도 내 생활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. 어머니는 항상 해외를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고, 아버지 역시 똑같았으니 단란한 가족이라 할법한 시간은 거의 가질 수 없었다 해도 좋았다.

 

, 하나만은. 삼촌이 비슷한 시기에 해외에 가버렸다는 걸 제외하곤, 모든 것이 여태까지와 그대로였다.

 

 

미안해, 츠바사군

 

 

일본을 떠나기 얼마 전, 삼촌은 역시 그렇게 말하고 약간 슬픈 듯이 나에게 사과했다. 해외로 가는 건 삼촌이 직접 맡았던 탐사위성 프로젝트의 대성공으로 높은 대우를 조건으로 한 오퍼가 들어온 것이 이유였던 모양이지만, 그때까지는 비슷한 이야기가 들어왔어도 쭉 거절을 해왔던 모양인 삼촌이, 왜 갑자기 결심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. 왜 삼촌이 사과를 했는지도. 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, 아버지와 삼촌이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던 건지도. 다만 그 후 내 생활의 어디서도, 삼촌의 존재는 없어져버리고 말았다. 마치 처음부터 없는 것이 당연했던 것처럼.

 

그로부터 주량이 늘어난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. 그저 언짢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그런 고집불통, 내가 알 게 뭐야라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. 나는 혹시 삼촌은 어머니가 싫어서, 그래서 결혼할 즈음에 아버지와 삼촌이 싸운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. 하지만 삼촌은 어머니와 만난 적도 없는데, 왜 그런 걸까 싶었다.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. 아무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.

 

그로부터 5.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고 어머니는 새로운 남편을 맞았다. 나는 이제 혼자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었고, 그래서 어느 쪽의 부양에도 들어가지 않고 호적을 분리하기로 했다. 성 만은 아버지 성을 받아서. 어머니가 재혼을 해도, 난 아버지의 아들이라 생각했으니까.

 

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고, 삼촌이 일본에 돌아왔다.

미안해 츠바사군이라고, 또 그 때처럼 조금 슬픈 듯이 웃으며.

그 표정을 봤을 때, 뭔가 나는, 왠지 정말.

 

――아아, 다행이다. 라고, 생각했다.










겨울

 

 

 

연초면 늘 있는 조촐한 부모 자식 3대간의 연석이었다.

 

 

고가 말이야, 결혼을 했어.”

 

 

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건 몇 년에 걸친 바이오스피어 계획의 참가에서 레츠가 돌아온 날이었다. 3년 만에 돌아온 고향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들려온 그 사실에 레츠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, 순간 결혼의 의미를 머릿속에서 찾고, 되새기고선 겨우 라고 답을 했다. 아무 이유 없이, 아무것도. 츠바사 군의 건도 있고 하니 다행이지 뭐 라며 요시에는 약간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. 해결해야 할 때 해결 돼서 다행이라고. 거기서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을 레츠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. 고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전화를 해도, ‘그야 우리 헤어졌잖아.’라고 냉담한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.

 

돌이켜보면 삼년 전. 몇 년 동안 연락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세계적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멋대로 결정해버린 레츠에게,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라는 거냐며 고가 말했고, 딱히 기다려달라고 얘기 한적 없지 않냐며 레츠가 답했다. 그 다음부터는 폭언을 하고, 그걸 또 폭언으로 받아치고. 헤어지자 어쩌니 하는 말이 해결되지 않은 채, 뒷맛이 개운치 않은 채로 레츠는 프로젝트에 참가했다. 돌아오면 사과하고 그땐 고의 고집을 들어줘야지 같은 걸 태평하게 생각했던 삼년간이었다. 그리고 지금. 사과고 뭐고, 고 안에선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었다는 사실이 들이밀어져 레츠는 멍한 기분이었다. 그 사실을 듣고 나서부터 쭉 멍한 상태이다. 오늘, 새해 인사차원에서 츠바사를 데리고 온 여성이 당연하단 듯이 세이바 가에 방문했을 때조차도 그건 계속되고 있었다. 그녀와 함께 본가에 온 고는 줄곧 레츠 쪽을 보지 않았다. 혼나서 토라졌을 때같은 얼굴을 하고있다고 레츠는 생각했다.

 

 

우왓

 

 

레츠의 사고를 가른 것은 고가 놀라서 뱉은 작은 소리와, 유리가 딱딱한 것에 부딪치는 쩡 하는 큰 소리였다. 그 쪽을 보자 맥주병이 거품을 내며 테이블 위에 액체를 쏟아내고 있었다. 허둥지둥 어머니가 행주를 가지고 오려 일어선다. 고는 망했다라도 말하고 싶은 듯이 맥주병을 들어올리고 있었다. 금색 액체가 테이블을 건너 다다미 위로 떨어진다.

 

 

뭐 하는 거야 ㄱ

뭐 하는 거니 고!”

――――

 

 

언제나처럼 한 레츠의 잔소리를 가로막은 것은 높은 목소리였다. 고는 레츠가 아닌 높은 목소리가 난 쪽으로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다. 우리 남편이 이렇네요, 미안해요. 그런 뉘앙스의 말을 그녀는 주위에 돌렸다. 그건 당연히 레츠에게도. 레츠는 그에 뭐라 할 말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. 잘 웃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.

 

 

――아아, 그런가

 

 

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. 고가 결혼을 해도 가정을 가져도, 고작 손을 잡는 일이 없어질 정도일 뿐, 본질적인 것은 분명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. 하지만 아닌 것이다. 세대를 가진다는 것은, 지금까지의 호적에서 빠진다는 것이기도 하다. 이제 그 장소는 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. 그런 간단한 것조차 내가 모르고 있었으니까, 분명 고는.

 

 

어머 레츠, 왜 그러니?”

급한 일이 남아있었던 게 생각났어. 갈 게.”

그래? 일도 일이지만……가끔은 사생활도 소중히 여기는 게 좋아.”

그렇네, 미안

레츠?”

 

 

상태가 이상하다 생각했을 것이다. 뭔가를 살피는 것 같던 어머니의 시선에서 도망치듯이 레츠는 본가의 현관을 나섰다. 1월 밤의 공기는 시리도록 차가웠다. 달도 없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레츠는 미간을 찌푸렸다. 마침내 나기 시작한 눈물이, 찬바람에 맞아 몹시 아팠다.